배트맨과 조커로 배우는 '정의'란 무엇인가?
「영화관에 간 철학」 리뷰
철학은 어렵고 딱딱하다는 편견, 혹시 갖고 계신가요? 수많은 철학자와 난해한 이론 앞에서 지레 겁을 먹었던 경험이 있다면 김성환 작가의 「영화관에 간 철학」(믹스커피)은 최고의 입문서가 될 것입니다. 이 책은 ‘가장 효과적인 철학 공부는 영화 감상이다’라는 흥미로운 주장으로 시작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 속 장면과 대사를 통해 철학적 사유의 실마리를 풀어내는 이 책은, 복잡한 개념을 구체적인 이야기와 연결해 철학의 문턱을 가뿐히 넘게 해줍니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많은 이들의 인생 영화로 꼽히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 3부작에 담긴 철학적 쟁점들을 중심으로 책의 내용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다크 나이트: 자유지상주의 vs 평등주의
영화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는 시민과 죄수가 탄 두 척의 배에 폭탄을 설치하고 서로의 운명을 결정할 기폭 장치를 넘깁니다. "오늘 밤, 너희는 사회 실험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그의 선언은 단순한 악행을 넘어, 우리 사회의 정의와 도덕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책은 이 장면을 통해 상반된 두 가지 정의관, 자유지상주의와 평등주의를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배트맨의 딜레마: 자유지상주의의 그림자
자유지상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최우선 가치로 두며, 국가의 역할은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배트맨의 활동은 딜레마에 빠집니다. 그는 고담시를 구원하는 영웅이지만, 그 과정에서 불법적인 감청, 폭력, 고문 등 개인의 자유권을 명백히 침해하기 때문입니다. 선한 목적을 위해 개인의 권리를 희생시키는 것이 과연 정당할까요? 책은 배트맨의 존재 자체가 자유지상주의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긴장을 보여준다고 지적합니다.
조커의 사회 실험: 평등주의의 재구성
반면, 존 롤스의 평등주의는 결과의 평등이 아닌 ‘공정한 절차’를 통해 정의를 구현하고자 합니다. 특히 ‘무지의 베일’이라는 사고 실험은 인상적입니다. 자신이 어떤 계층, 성별, 인종에 속할지 모르는 원초적 상태에서 사회 규칙을 정한다면, 누구나 사회적 약자에게 최대의 이익이 돌아가는 ‘차등의 원칙’에 합의할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조커의 페리 실험에서 시민과 죄수, 어느 쪽도 기폭 장치를 누르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롤스의 사상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한 합의, 그것이 바로 정의의 출발점이라는 메시지를 남기는 셈입니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 목적론 vs 의무론
3부작의 마지막 편인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우리는 또 다른 철학적 갈림길과 마주합니다. 바로 ‘좋은 결과를 위해서라면 어떤 행동이든 용납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저자는 이를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과 칸트의 의무론(법칙론)을 통해 분석합니다.
'선한 목적'은 '폭력적 수단'을 정당화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은 모든 존재와 행위에는 고유한 목적(텔로스)이 있으며, 그 목적을 잘 실현하는 것이 ‘선’이라고 봅니다. 이 논리에 따르면, 고담시를 구원한다는 선한 목적을 위해 배트맨이 행하는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생각의 위험성은 명백합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논리는 역사적으로 노예제와 같은 끔찍한 차별을 옹호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습니다.
“내가 지금 하려는 것은, 지금까지 해온 어떤 행동보다 훨씬 더 숭고한 일이다.”
책은 ‘두 도시 이야기’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하며 배트맨의 숭고한 희생이 공동체의 선을 위한 목적론적 행위임을 암시합니다. 그의 폭력은 불법적이지만, 그가 추구한 목적은 고담시의 평화라는 더 큰 선이었습니다.
결론: 영화, 철학을 담는 가장 완벽한 그릇
「영화관에 간 철학」은 이처럼 대중적인 영화를 훌륭한 철학 교재로 삼아, 우리 삶과 맞닿아 있는 질문들을 탐구하게 합니다. 매트릭스, 첫 키스만 50번째, 기생충 등 다양한 작품을 넘나들며 미래, 사랑, 관계, 정의와 같은 핵심 키워드를 풀어내는 방식은 지적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철학이 어렵게만 느껴졌다면, 이 책과 함께 익숙한 영화를 새로운 눈으로 감상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정답을 찾기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하고 질문하는 힘을 기를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